작성일 2017/12/12 (화) 07:00
분 류 개인전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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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회시간의문-문수만전 평론

시간의 문을 통과하는 자연과 문명의 행렬

이선영(미술평론가)

보이지 않는 중심을 둘러싼 둥근 원, 그 원 속의 또 다른 원들이 있는 문수만의 작품은 정적인 가운데 움직임이 있다. 끝과 끝이 이어진 원 자체가 정중동(靜中動)이다. 전시된 모든 작품에 일관되게 적용된 원형 구도는 차이 짓기를 위한 동일한 바탕을 이룬다. 우연 또한 필연이라는 맥락에서 힘을 발휘한다. 마찬가지로 질서가 있는 가운데 무질서가 있다. 그가 잘 그리는 나비까지 포함한다면, 무거움 속의 가벼움 또한 추가될 수 있으리라. 문수만의 작품은 이렇게 상반된 가치들이 밀고 당기는 역동적인 장을 이룬다. 둥근 작품들에는 중심이 있는 자리가 있을 뿐, 어느 한 점으로의  환원은 없다. 그리고 다양한 중심들 사이에 분포하는 형상들이 작품들 간의 차이를 만든다. 반복과 차이 속에서 무한 회귀하는 작품들은 전시 작품의 한 제목처럼 [시간의 문]을 통과한다. 복잡한 작업공정이 깔려 있는 그의 작품에는 시간성이 깔려 있었으나, 2018년의 첫 전시 작품에서 시간성은 더욱 드러난다. 그것은 우리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청동거울 유물의 이미지가 있는 [시간의 문] 시리즈는 거울의 뒷면, 즉 공간이면서도 시간성을 암시한다. 거울은 인간을 상상의 요구에 맞춰 고착시키지만, 거울의 표면이 아니라 이면을 염두에 두는 것은 시간의 축 속에 자아를 배치하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유물은 현장에서 발굴되고 박물관에 보존된 이후에는 부식의 과정이 완화된다. 시간성에는 변수가 많이 개입된다. 작가 역시 어느 순간에 이 낡아지는 과정을 멈추게 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에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그의 말로는 ‘망치기 직전까지’ 간 작품도 꽤 있었다. 이전 작품처럼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쉬울 정도였다. 그것은 완결된 과정을 열어놓는 것에 해당한다. 필연적인 맥락에 우연성을 도입하는 것을 말한다. 이번 전시에서 긁히고 부식된 형태, 파묻혀지거나 우연적으로 드러난 형태들을 비롯하여, 시간성을 암시하기 위해 더 많은 공정이 추가되었다. 빈티지 청바지가 그냥 청바지보다 더 많은 수공이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문수만의 작품은 오래된 문화재처럼 정교하고도 분위기 있는 사물로서의 면모를 획득한다. 작가가 매혹되는 것도 자의와 자유를 구별하지 못하는 일단의 현대미술은 아니다. 그러나 시뮬라크르적 속성을 띄는 그의 작품은 현대성의 한가운데에 있다. 미술계에 시뮬라크르에 대한 주제의 작품이 적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설득력 있기 위해 갖춰야할 정교함을 수반한 작품이 흔치는 않다. 작품이 문화재의 가치를 생각한다면, 완벽한 것을 더욱 완벽하게 하는 것은 시간 아닐까. 순간 속에 완결된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작품들은 이제 지속의 단계에 들어섰다. 원 가운데 또 다른 원들, 그 사이로 촘촘한 바퀴살들이 뻗은 [시간의 문]은 마치 태양처럼 보인다. 그것은 인간 이전에도 있었고 인간 이후에도 있을 영겁회귀의 궤도를 돈다. 이러한 우주적 차원의 사건은 지상에서도 반복된다. 원들 사이의 공간 속에 꽃이 펼쳐져 있는 작품들은 지상에서 영겁회귀의 직관적 모델로 식물을 떠오르게 한다. 식물학자들은 한겨울의 나목이 죽은 듯 하다가도 다음해 다시 꽃을 피우며, 인간들로 하여금 부활에 대한 생각을 하게 했다고 말한다. 

문수만의 작품에서 꽃들은 유기적인 형태를 가지지만, 짝을 맞춰 대칭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그것은 자연의 내재율을 반복한다. 그에게 자연은 단지 외관이 아니라 과정이며, 이러한 과정에는 리듬이 있다. 살아있는 심장을 가진 모든 생명체들에게는 직관적으로 리듬에 대한 선호가 있다. 작가는 기계적 패턴의 반복이 아니라 생명의 율동을 흉내 내는 것이다. 작품들 간의 관계도 리드미컬하다. 전시장 벽에 걸린 바퀴처럼 둥글둥글한 형태들은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움직이는 듯한 환영이 있다.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동일한 밀도와 강도를 유지하고 있는 다른 지름을 한 작품들은 전시장 벽에서 가상의 원근감을 형성한다. 가령 작은 것은 멀리 있는 것, 큰 것은 가까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것들은 좌우로도. 그리고 전경과 후경 사이로도 움직이는 듯하다. 그것들은 제자리에서 돌 뿐 아니라, 좌우로도 전후로도 움직인다. 행성이 자전을 하면서 항성을 공전하듯이 움직임은 여러 차원에서 동시적이다. 여기에서 공간은 시간화 된다. 

그의 작품에는 수많은 층이 있었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발굴된 유물같이 흐들흐들한 시간의 겹을 각인한다. 밑에서 올라오는 것도 있으니 시간의 지층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그것들은 단지 시공간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것만은 아니다. 오래된 껍질을 사라지면서 새로운 속살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작품 속 위아래 층들의 관계는 본질적으로는 캔버스에 아크릴로 그린 회화인 작품에 잠재적 운동감을 부여한다. 어떤 것은 떠오르고 어떤 것은 가라앉는다. 둥근 형태는 질서감이 있지만, 겹과 층 속에서 끊어질 듯 이어지는 선들은 질서감을 와해시키는 요소이다. 반듯한 형태들은 먼지로 화하고 있다. 엔트로피(무질서도)는 증가하고 있다. 두들겨서 만든 작품이라는 의미를 담은 [Klopfen]은 중간층에 대칭적으로 배열한 8개의 원을 포함하여 원 속의 원을 반복하는데, 가장 큰 원인 작품의 외곽은 원들의 세계에 내재한 안정감을 와해시킬 수도 있는 힘이 작동한다. 작품 [Simulacre(041708)]은 그러한 힘이 전체를 장악한다. 

작품 [FRACTAL(081612)]에서는 성난 파도처럼 휘몰아친다. 작품 [Simulacre(041708)]는 금색 문양이 들끓어 오르는 거친 바탕 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있지만, 향후에 문양을 이루는 그 선들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작품 [Simulacre(061709)]에서 원 속의 원들 사이에 날고 있는 학이 있는 공간은 평평하지 않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인 [To Father(021609)]는 인간의 역사 또한 자연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유물 같은 느낌을 잘 살린 이번 전시 작품은 권력이나 죽음이라는 주제를 포함한 보편적 인간사는 결국 자연과 비슷함을 암시한다. 근대의 낭만주의자들은 그들이 열광했던 폐허가 자연화 된 역사임을 인식했다. 오늘날 첨단과학은 자연의 설계도를 재배치하여 새로운 역사를 쓰려고 한다. 인간의 규칙은 자연의 법칙을 모사한다. 자연은 자연 그자체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자연은 그자체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문화에 의해 매개된다. 문화의 정점에 있는 것은 예술이다. 지금도 그 유적지가 있는 수원의 화성에서는 재연 행사가 종종 열리곤 한다. 

어딘가에는 그 모델—그러나 이전시대의 이름 없는 도공들은 무엇을 ‘원본’으로 작업을 한 것인가—이 있지만 조금씩 변형시켜 다른 것으로 만드는 문수만에는 정조대왕의 행차도처럼 의례(儀禮)의 속성이 있다. 의례는 단지 없어져야할 구태나 부조리는 아니다. 사회자체가 의례의 속성을 띄고 있다. 예술에서 의례적인 것은 장식이다. ‘새로움의 전통’인 현대미술 역시 이전의 관례가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변주를 통한 유희를 즐기는 문수만의 작품 또한 장식과의 관련 속에 있다. 그러나 장식 같은 기계적인 반복이나 고정된 기법과는 거리가 있다. 다만 장식에 고유한 완벽한 기교와 그에 따르는 ‘유혹적 측면’(장 보드리야르)은 남아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엄청난 에너지가 깃들어있는 그의 작품은 일단 관객에게 놀라움을 야기하는 것이다. 의례는 최초의 모델을 반복하지만, 최초는 불확실하다. 원본 없는 반복은 그의 작품이 복제가 아닌 시뮬라크르의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시작도 끝도 없는 둥근 구도는 시뮬라크르의 적절한 이미지라고 생각된다. 시간의 켜를 둘러 쓴 둥근 구조는 유한의 구도를 벗어난다. 모사의 과정에서 재료에 대한 교란은 자주 일어난다. ‘원본/복제의 이원 항을 해체하는 시뮬라크르’(질 들뢰즈)는 순수에 대한 가상을 버린다. 문수만의 작품은 그림이면서 도자기 같고, 도자기 같으면서도 금속 같다. 이번 전시에서는 백자인데도 청자 빛이 감도는 작품이 있다. 자연 또한 조금씩 달라진다. 가령 그가 잘 그리는 나비는 어떠한가. 더 이상 실제의 나비를 안보고도 그릴 만큼 익숙한 그의 나비는 자세히 보면 아름답기보다는 징그럽다. 너무 자세해지면 실제가 아니라 환상같다. 나비가 아니라 나비 그림이니까 환상적 환영(illusion)이라고 해야 할까. 재료나 기법의 변주 또한 확실하다. 작품 [To Father(021609)]에서 원본은 그림이지만, 작가가 디지털로 복원시킨 이미지들은 이중 상감기법으로 표현되었다. 그 기법은 도자 작품에서 쓰이곤 하지만, 그는 어두운 바탕에서 빛나는 동 색깔의 물감으로 그렇게 했다. 

작가는 캔버스에 물감으로 금속 같은 표면을 재현한다. 금색을 미리 칠하고 겹겹의 작업 과정을 통해 나타나는 최종의 질감은 금속성으로 드러난다. 이 작품은 정조가 비극적으로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찾아가는 행렬도를 원본으로 삼아 원의 구도 속에서 재탄생시킨 것이다. 가로 15미터의 스펙터클한 구도를 원형으로 재배치했다. 스펙터클하고 기념비적인 작품을 일종의 그릇에 담은 셈이다. 김홍도와 화원들에 의해 제작된 원본이 선적이어서 좌우로 열려있다면, 문수만의 작품은 그 대열을 둥글게 오므리면서도, 장장 1800여명의 사람들과 800여 마리의 군마가 동원되었다는 거대한 대열의 느낌을 보존한다. 선적 구도가 둥근 구도가 되기 위해 대상들 간의 간격은 조절되었다. 군사들을 외곽에 더 촘촘하게 배치했다. 마치 망원경으로 역사를 보는 듯한 모습이다. 먼 공간을 앞으로 당겨오는 둥근 틀은 시간을 당겨오는 것이다. 

[정조대왕의 화성능행도]에 대한 관심은 작가가 드레스덴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기념비적인 복원 예술 작품 [군주들의 행진]의 영향을 받았다. 유럽에 그러한 보물이 있다면 한국에도 있다는 자의식의 발로이다. 누군가한테는 죽은 전통이나 진부한 클리셰처럼 간주되는 백자나 청자는 그에게 영감을 준다. [Cloud] 시리즈는 청자의 문양을 원안에 펼쳤다. 하늘을 나는 학들이 있는 작품 [Cloud(051709)]는 원으로 상징되는 무한을 새가 날고 있는 하늘과 중첩시킨다. 그러나 시간의 켜를 둘러쓴 그것은 티클 하나 없는 하늘이 아니다. 구름이라는 제목은 담배를 즐겨했던 운보 김기창의 담배함에서 시작되었지만, 최초의 공예품과 달리 정형화될 수 없는 측면이 강조되었다. 인간은 담배연기 입자의 운동이나 구름의 가장자리를 확정할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의 수레바퀴처럼 생긴 작품 [Cloud(041708)]에서 바퀴살에 해당하는 부분은 직선이 아니라 식물 같은 유기적 선이다. 

문수만의 작품은 고풍스럽지만, 동시에 현대 과학의 혼돈(chaos)이나 복잡성(complexity), 프랙털(fractal) 이론을 떠오르게 한다. 그런 이론들에 내재된 서사가 엄격한 인과론에 근거한 고전과학을 넘어서면서 다양성을 추구하는 예술의 서사와 중첩되는 부분도 있지만, 원래 공학도였던 작가의 이력과도 무관치는 않은 듯하다. 향후에 무엇을 하든 자신의 모태 언어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의 ‘구름’은 대칭을 이루면서 매우 안정적인 구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안정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순간의 고정일 뿐이다. 그것은 엄격한 기하학에 있는 정적인 균형이 아니라, 자연에 내재된 균형에 대한 비유이다. 제임스 글리크는 [카오스 이론; 무질서 속의 질서]에서, 고전 기하학에서 다루는 형태는 선분, 평면, 원, 구, 삼각형 그리고 원추 등인데, 그것들은  실재를 강하게 추상화한 것으로 플라톤적인 조화의 철학에 강한 영감을 주었다고 말한다. 

예술가들은 그 도형들에서 이상적인 미를 발견했고 천동설을 주장하던 천문학자들은 그것을 이용하여 우주론을 정립했다. 그러나 복잡성을 이해하기에는 그 도형들이 잘못 추상화되었음이 드러났다. 과학은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원이 아니라 타원의 중요성을 밝혀냈으며, 지구는 우주의 중심도 아니고 평평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문수만은 ‘지구는 평평하다는 식의 생각’은 나름대로 순수하다고 평가한다. 제임스 글리크는 새로운 기하학은 둥글둥글하지 않고 우툴두툴한, 또 매끄럽지 않고 거칠거칠한 우주를 반영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구멍이 많고 움푹 파이고 잘리고 꼬이고 서로 엉켜있는 것의 기하학이었다. 문수만의 ‘구름’들 속에 있는 기하학은 이러한 이론이 암시하는 거친 기하학에 해당된다. 우리는 양떼구름과 뭉게구름 등을 구별하지만, 구름이란 단 한순간도 고정되지 않는다. 역동의 시대에 구름이나 안개의 이미지는 자주 등장하곤 한다. 모든 고정된 것, 정지된 것을 극도로 거부했던 철학자 미셀 세르나 질 들뢰즈를 열광시켰던 윌리엄 터너의 그림을 떠올려 보라. 

문수만의 작품에서 하늘이 공간이라면, 거기에 떠있는 구름이나 새(또는 곤충)는 공간이기 보다는 시간이다. 시간이란 탄생과 소멸에 관련된다. 철학자 질 들뢰즈는 카오스에서 시간을 본다. 들뢰즈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카오스를 무질서나 무(無)가 아니라 희미하게 떠오르다가 이내 사방으로 흩어져 버리는 모든 형태들의 무한한 속도로 정의한다. 들뢰즈에 의하면 카오스는 모든 가능한 미립자들을 포함하며 일관성이나 지시 관계, 그리고 결과도 없이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져버린다. 그것은 모든 가능한 형태를 이끌어내는 잠재태로서의 공백을 말한다. 문수만 역시 잠재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을 끌어내려고 한다. 그의 둥근 작품들은 자연이나 예술의 비밀이 담긴 보물창고의 다이얼처럼 계속 돌아가면서 열림의 순간을 기다린다. 그 속도는 정보혁명 시대의 기술 혁신들보다는 느릿하지만 멈추지는 않는다.

[Simulacre] 시리즈는 예술과 과학 모두에 적용될 수 있는 방식이 있다. 선적 문양으로 꽉 찬 작품 [Simulacre](071709)]는 경계 없는 자연을 모델로 한다. 작품 [Simulacre](061709)]을 이루는 여러 경계는 바깥부터 흐릿해진다. 문수만의 작품은 물리적으로 단단하지만 그것이 내포하는 바는 유동적이다. 차가운 고체가 아니라 뜨거운 액체나 기체의 이미지이다. 선적인 질서는 에너지에 의해 급격하게 변화한다. 에너지는 선적인 질서를 혼돈에 빠트린다. 하늘과 구름은 소용돌이친다. 이러한 공간에서 시간은 어떻게 흐를까. 과학철학자 미셀 세르는 [해명]에서 자신의 혼돈의 이론을 고전적인 선적 이론과 구별한다. 시간이 복잡하고 예기치 않게 복합적으로 흐른다는 것을 강조하는 미셀 세르는 날씨와 시간은 같은 단어 ‘temps’에서 유래함을 지적한다. 난류와도 같이 유동적인 문수만의 큰 소용돌이 속에 작은 소용돌이를 보여준다. 그것은 프랙털 시리즈도 마찬가지이다. 

정적인 조화와 동적인 연속이 함께 가는 문수만의 작품은 체계를 가지지만, 그것은 딱딱하게 구조화되지 않난다. 그의 체계는 ‘모든 체계가 묶인 에너지’(미셀 세르)라는 점에서만 체계적이다. 그 촘촘함 덕분에 견고한 방패처럼도 보이는 작품 [Simulacre](081709]는 큰 원(대우주)과 작은 원(소우주) 사이의 영역에 가득한 넝쿨 식물들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로 끝나는지 모르는 소용돌이 같은 역동감이 있다. 또한 그것은 작가말대로 ‘인간적 삶의 차원에서 복잡하게 얽힌 관계나 네트워크 세계’ 등을 떠올린다. 미셀 세르는 [헤르메스]에서 소용돌이는 율동적이고 동시에 지향성을 띤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원형으로 돌면서 달아나는 소용돌이는 상황에 대한 비유가 된다. 세르는 이 근본적인 소용돌이가 없다면 어떤 것도 형성되지 않으며, 어떤 것도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카오스에서 시간이 도래한다. 그러나 문수만의 작품 속 카오스는 보이지 않는 패턴을 깔고 있다. 

작가는 이 시리즈에 대해 ‘시뮬라크르’처럼 ‘프랙털’이라는 단도직입적인 제목을 붙였다. 가장자리로부터 가운데로 몰려드는 역동적인 힘이 우툴두툴한 표면으로 드러나는 작품 [FRACTAL(081612)]은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용암이나 고갈되지 않은 에너지로 변화무쌍한 표면의 운동을 지속하는 바다를 떠올린다. 그것은 막사발의 우툴두툴한 면(매화피)에서 왔다. 전통은 자연과 더불어 작가에게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 되는데, 그가 참조하는 도자기의 문양을 그림으로 만들 때 차원의 변주가 일어난다. 입체가 평면으로 가면서 빈공간이 생기는데, 그 빈 공간을 채우는 방식에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다. ‘부서진 상태’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온 ‘fractal’은 시간의 문을 통과하며 부서지고 있는 외관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의 내적 원리이기도 하다. ‘두들겨서 만들었다’는 의미를 가지는 [Klopfen] 시리즈에서도 물고기 비늘을 반복하는 공간, 원 속의 원들은 유사함을 반복한다. 담배연기와 구름, 난류 등에도 불규칙성 속의 규칙성이라는 프랙털 형상이 잠재해 있다. 

필립 볼은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임계질량에서 이어지는 사건들]에서 큰 규모에서 나타난 구조가 점점 더 작은 규모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현상, 즉 프랙털이 1980년 초에 물리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그런 패턴들이 자연의 유기적 형태와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잎 새는 나무의 가지를 반복한다. 그것은 가지들이 매우 높은 효율로 허용된 공간을 채우기 때문이다. 공간을 채우는 효율을 수학적으로 나타낸 것이 바로 프랙털 차원이다. 필립 볼에 의하면 배율이 달라도 형태나 모양이 비슷하다는 사실은 프랙털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제임스 글리크는 [카오스 이론; 무질서 속의 질서]에서 자연의 불규칙한 패턴과 무한히 복잡한 형상에 대한 탐구에는 지적인 교차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체 유사성(self-similarity)이라고 말한다. 자기 유사(類似), 또는 자기 상사(相似)성이 있는 문수만의 작품에서 원, 또는 원 속의 원을 채우는 것은 이러한 프랙털 곡선이다. 

문수만의 작품은 프랙털 이론이 암시하듯이 복잡하면서도 거기에 숨어있는 조직적인 구조가 있다. 자체적으로 유사함을 의미하는 프랙털은 대칭적이다. 물론 제임스 글리크가 주목하는 대칭성은 좌우 또는 상하 대칭이 아니라, 대규모와 소규모 간의 대칭이다. 문수만의 작품에도 규모간의 차이가 있다. 가령 작품 [cloud(051709)]에서 원 안의 원들의 세계가 그것이다. 작품들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구름 또한 나무나 산맥, 그리고 눈송이에 나타나는 배열처럼 프랙털 적이다. 이 모든 형상들은 ‘동력학적 과정이 물리적 형태로 구체화된 것’으로, ‘회귀, 즉 패턴 안의 패턴을 의미’(제임스 글리크)한다. 무엇보다도 그것들은 ‘유한한 공간 내에 있는 무한한 길이라는 역설적인 결과’(제임스 글리크)를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예술이 지향하는 바—‘예술은 무한을 복원시키는 유한을 창조하고자 한다’(들뢰즈)--이다. 또한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이 무한을 갈망하는 종교가 지향하는 바이기도 하다. 

문수만의 작품에서 보이는 애매한 차원 또한 프랙털 이론과 공유된다. 요시마사 요시나가는 [과학과 철학, 두 개의 거울]은 1975년 만델브로트가 주목한 ‘자연계에 존재하는 리아스식 해안의 해안선과 수목의 형, 꼬불꼬불 흐르는 강과 쭉 이어져 있는 산’ 등의 예를 든다. 저자는 지구상에 있는 산들의 경관이 가진 프랙털 차원은 약 2.1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평면이상이지만 입체 이하의 것이다. 다시 말해 2차원 이상이지만 3차원 이하이다. 문수만의 작품에도 이러한 애매한 차원이 있다. 그는 도자기같은 입체를 ‘그림’으로 그리지만, 정확히는 만들지만, 그림처럼 납작하지는 않다. 그의 작품의 두께는 두텁고 조형적으로 처리가 돼있으며, 어떤 작품은 가장자리로부터 시작된다. 그의 작품 틀은 투명하지 않다. 거기에는 물질적 불투명함이 있다. 체계는 에너지에 의해 교란되고 에너지는 또 다른 체계를 형성한다. 프랙털 도형처럼 분기된 시간들이 공간을 채우는 문수만의 작품에서 ‘시간의 문’은 하나가 아니다. 여기에서 역사를 포함한 시간은 ‘복잡한 다양성’(미셀 세르)을 따라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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