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17/01/23 (월) 18:07
분 류 개인전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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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을 위한 존재의 자리

생성을 위한 존재의 자리



이선영(미술평론가)



보편화된 분업이 생산력과 더불어 인간의 소외를 증대시켰다는 역설은 근대에 대한 비판의 몸통을 이루는 서사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혁명으로 누군가는 개혁으로 대안을 내놓곤 했지만, 진보 또는 발전의 양면성은 여전히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모순이다. 극단적 분업에 의한 파편화된 상황을 극복하는 일상적 방법은 기껏해야 노동 이외의 시간인 여가를 통해서이다. 그러나 여가를 채우는 소비는 소외된 노동을 지탱시킨다. 이러한 악순환, 또는 악순환에도 진입하지 못하거나 탈락된 유예된 인생에게 예술은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분업화된 노동과 달리, 예술은 개인의 상상은 물론, 꿈과 무의식, 젖 먹던 힘까지도 요구하는 총체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밑도 끝도 없는 예술적 과정은 누군가에게는 고난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즐길만한 것이 될 수 있다. 총체적 활동으로서의 예술은 얼마 전 대구에서 열린 문수만 개인전 주제인 ‘몰입’(Finding Flow)을 자아낸다.

성공한 벤처 사업가였던 30대를 뒤로하고, 40대에 미술을 시작한 그는 누구보다도 예술의 힘을 믿고 의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수만이 뒤늦게 속하게 된 한국의 미술계는 그러한 비전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물론 그는 그러한 ‘객관적’ 비전과 상관없이 작업을 지속할 인물로 보이지만 말이다. 한 해에 비엔날레만 몇 개가 동시다발적으로 열릴 정도로 제도적으로 비대해진 미술계도 파편화된 작품을 파편적으로 반영할 뿐이다. 미술에 대한 메시지들에는 전체가 담겨있지 않다. 매달 나오는 잡지들에 수록된 작품 사진은 작품의 전모를 보여주지 못하고, 이에 대한 설명은 충분치 못하다. 하다만 작품, 쓰다만 글이 가득하다. 각자의 영역에서 생산된 것들은 온전히 향유되지 못한다. 이러한 파편성이 지속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배후의 권력 때문일 것이다. 불행하게도, 작가가 작품에 모든 것을 쏟는 것은 무모한 출혈 행위이며, 미진한 작업들을 돋보이는데 필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권력이라는 것이 분명해 지고 있다. 어딜 가도 돈과 줄 이야기만 한다.

패션쇼에서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괴상한 의상들만 즐비하다면, 관객은 패션의 난삽함을 탓할 것이 아니라, 누구도 안보고 안 사 입을 것이니 내 맘 대로라는 식의 무대를 가능케 하는 이면의 권력을 봐야할 것이다. 편향된 정보를 자의적으로 늘어놓는 발신자들 덕분에 미술은 점점 더 소수자의 것이 되고 있다. 문수만의 작업은 작품 규모에 상관없이 밀도와 강도가 높은 응집된 스타일을 가지는데, 그것은 부조리를 자연화 하는 권력과 거리가 먼 곳에 있는 작가의 전략 아닌 전략이라고 생각된다. 동전 한닢처럼 어디선가 또르르 굴러 올 법 한 둥근 작품들은 그 하나하나가 충만하다. 단편으로서 충만한 작품은 작가 자신을 비롯한 어떤 ‘배후의’ 권력 없이도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게 할 것이다. 오는 10월 일본 고베의 GALLERY 北野坂(키타노자카)에서 열리는 개인전 ‘도공의 날개’에 전시되는 작품들은 작가의 게임 원칙에 의거해 만든 단편에 많은 것을 접어 넣는다.

꽃이나 나비, 심지어는 허공이나 균열 같은 섬세한 소재를 배에 바르는 외장재로 단단하게 갈무리된 그의 작품은 닫아 놓음으로서 열리는 역설이 있다. 완벽한 것만이 ‘더불어’가 가능하다. 각각의 단편들은 한 줄기를 잘라낸 단면처럼 시리즈 별로 유사한 상을 가진다. 줄기가 통시적이라면 단면은 공시적이다. 어떤 줄기의 단면 같은 모양새는 자족성과 연속성을 동시에 만족시킨다. 그것들은 과거와 미래를 가지면서도 충만한 현재를 누린다. 그것들은 존재하면서도 생멸(生滅)한다. 잘라낸 단편 같은 작품은 최대한 함축적 순간을 담음으로서 공간예술이 시간을 처리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그러한 방식은 부분을 부분으로 방치하지 않고, 부분 속에 전체를 담을 수 있게 한다. 관객은 이러한 불연속성 속에서 연속성을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것은 꽃이 하나 가득 펼쳐 있고, 어느 것은 나비들이 하나씩 있으며, 어느 것은 허공과 빈 균열만이 있다. 접시를 닮은 둥근 캔버스는 허공을 담는다.

끝과 끝이 이어진 둥근 틀은 무, 또는 무한을 담기에 적당한 상징적 형식이다. 그것은 무한을 담는 유한으로서의 성상이나 예술의 속성을 극대화 한다. [陶工] 시리즈에서 작가는 공백에 대한 저항(또는 공포)이 있는 관객을 위해 얼룩이나 명도의 변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균열로 가득한 청자색 허공을 보여주는 작품 [Filling empty-2]는 만물이 유래하는 어떤 표면을 튕겨서 갖가지 지형을 만들어내는 신적 행위를 떠올린다. [調香] 시리즈와 []은 중심에서 바깥으로 퍼져 나가는 향기나 소리 같은 힘의 흐름을 보여준다. 그러한 에너지가 물질화되면 작품 속 그것처럼 산과 계곡 같은 모습이 될 것이다. 산과 계곡을 비롯한 ‘모든 단단한 것은 언젠가는 에너지’(미셀 세르)였을 것이다. 그것은 또한 다른 시리즈에서 나타나는 나비의 맥처럼 생명체에도 편재하는 에너지의 그물망이다. 문수만의 작품에서 맥은 크랙같은 미세한 방식으로 구현되기도 한다.

온도와 압력의 영향을 받는 미세한 균열은 연결되어 있던 것의 단절을 암시한다. 단절은 연결을 암시한다. 그의 작품에서 단절되어 보이는 굵은 맥들은 그 아래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Finding Flow] 시리즈는 다양한 청자 빛 바탕에 꽃의 형상을 배치하고 때로 중심과 외곽 사이의 공간을 복잡한 문양으로 채워 미로에서의 방황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만다라 같다. 둥근 캔버스는 정지된 가운데 움직임을 내포한다. 그러나 바퀴살의 중심처럼 가운데는 고요하다. 때로 작품 [調香-04]처럼 작품 중심에서 모든 것이 생겨나거나 빨려 들어가는 회오리가 잠재한다. 작지만 무한의 공간을 담은 듯한 작품에서 비어있는 중심의 역할은 크다. 장 살렘은 [고대 원자론]에서 우주를 무한하다고 본 철학자 에피쿠로스를 소개한다. ‘회오리에서 생겨나는 세계들의 수가 무한하다’는 에피쿠로스의 테제는 비어있는 중심에 잠재적 움직임이 있는 문수만의 작품에도 적용된다.

고대 원자론자들에 의하면 하나의 세계(cosmos)가 형성될 때 온갖 종류의 원자들의 회오리가 우주에서 떨어져 나왔다. 원자론자들은 우주를 물체들과 허공으로 이뤄져 있다고 보았다. 물체들의 수와 허공의 크기도 역시 무한하다. 원자론자들에게 우주는 ‘전체적으로 무한하며 그것의 부분 집합인 물질과 거대한 허공도 역시 무한하다’(루크레티우스). 이 무한한 우주 내에서 온갖 종류의 결합과 배치 덕분에 원자들은 바로 이 세계를 조성한다. 식물의 형상이 있는 [Finding Flow] 시리즈는 마치 바퀴살 같은 잠재적 움직임이 발견된다. [陶工] 시리즈에는 식물이 바퀴살 모양으로 배치된 작품도 있다. 바퀴살의 중심에는 움직임이 없다. 이 중심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이는 자’(아리스토텔레스)인 것이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陶工] 시리즈에서 중심에 있는 나비는 고정되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원둘레를 따라 ‘영원히 회귀하는’(니체) 움직임의 중심이며, 이 중심은 반복과 차이의 운동을 거치며 조금씩 변화한다.

생태계에 미묘하게 반응하는 나비들 역시 인간과 함께 공()진화할 것이다. 격세유전적인 나비들이 있는 [陶工] 시리즈는 문수만의 특기인 나비 그리기가 잘 발휘된 시리즈다. 작업 초창기부터 시작된 나비라는 도상은 자연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작품 속 나비들은 형식을 동일하게 유지함으로서 세부의 차이를 극대화한다. 그것은 하나를 통해 다양성을 극대화하는 펼치는 방식이다. 둥근 캔버스에 한 마리씩 있는 것들을 한꺼번에 보고 있노라면, 나비가 한번 날갯짓을 할 때마다 무늬가 바꿔 입는 듯하다. 그리고 그 날갯짓은 자신이 속한 시공간 역시 변화시킬 것이다. 나비의 날갯짓은 미묘한 파장을 일으키면서 저 멀리에 있는 시공간까지도 ‘나비 효과’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다른 작품에서 힘찬 맥이나 미세한 크랙은 그러한 여파를 형상화한 것이다. 작가는 자연의 다양함을 시뮬레이션 한다. 확대경을 포함한 이런저런 기구들이 있는 작업대 위에는 나비 사진이 붙어 있지만, 이제 그는 더 이상 나비나 나비 사진을 보고 그리지 않는다.

문수만의 작품은 정교하긴 하지만 재현이 아니다. 재현으로는 그 같은 다양성과 유희가 가능하지 않다. 확대경으로 보면 촘촘히 그려진 솜털들도 기이한 느낌을 주지만, 다양함의 인상을 주도하는 것은 나비의 날개 부분이다. 그는 특정한 나비를 이미지로 고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비가 발생하고 변태할 때 행해졌을 과정을 모방한다. 붓질은 모종의 물결을 낳고, 이후 세필이 더해져 나비의 무늬로 결정화된다. 나비라는 대상은 물론 그것이 자리 잡는 배경을 만드는 과정에서 우연적 요소가 작용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나비는 환상에 가깝다. 환상이기에 그토록 선명하다. 나비라는 지시대상은 환상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단초이다. 초창기 작업에서 수집 상자를 떠올리는 하얀 바탕은 균열이 있는 도자기나 부식된 청동 같은 색과 틀로 변화했다. 미세한 균열이나 부식된 금속 같은 표면연출은 인위적 배경 또한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 같은 면모를 부여한다.

여전한 것은 나비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형태와 실물 같은 착각을 주는 그림자의 존재다. 하얀 사각형에 갇혀있던 아름다움과 다양성의 상징은 무한을 상징하는 색과 형태 위에 안착되어 있다. 그러나 여전히 컬렉션처럼 한 가운데에 존재한다. 안보고도 그릴 수 있을 만큼 몰입했던 소재인 나비는 자신의 분신이며, 이 분신은 무한 속의 유한을 상징하는 바탕 한가운데 자리한다. 나비 날개의 색과 무늬 또한 무한하다. 작가는 무한 속에 무한을 접어 넣는다. 규모가 작다고 해서 이러한 무한성이 약화되지는 않는다. 문수만의 작품의 특징은 규모와 상관없이 강도와 밀도가 유지된다는 점이다. 이 전시의 모든 원형 캔버스는 이전의 사각 캔버스처럼 이미지를 담는 중성적 바탕이 아니라, 그자체로 상징적 효과를 발휘한다. 그의 작품 속에는 정지 속에 움직임이 있듯이 침묵 속에 소리가 내재한다. 초창기 나비가 자리했던 정사각형 캔버스나 현재의 둥근 캔버스는 음악 애호가이자 ‘재미삼아’ 만들어봤던 CD의 형식일 가능성이 있다.

상표만 붙이면 판매도 가능할 법한 그의 수제 CD는 그의 그림처럼 원본 없는 복제(시뮬레이션)의 산물이다. 원은 물론 정사각형 캔버스는 미술사적으로 성상 같은 독특한 경우에나 활용되곤 하였으며, 그림에서는 보편적이지 않는 프레임이다. 음악 애호가로 하여금 음악이 지속되는 시간 동안 황홀감의 체험을 안겨줬을 음악 디스크는 시간을 공간화, 물질화 한다. 대칭적인 안정감을 확보하고 있는 둥글거나 정사각형의 틀은 완벽함에 대한 이미지다. 미술사나 연금술 전통의 이미지에서, 정사각형을 감싸는 원이나 원 안의 정사각형 속에 완벽한 인간을 상징하는 도상들이 종종 발견된다. 완벽함에 대한 느낌은 그 기원이 종교나 기술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심미적 체험이다. 심지어 독재자도 그러한 심미적 체험에 빠지곤 한다. 그것은 물신적 소유욕을 자극하여 음원이 보편화된 시대에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매체로 남아있다.

문수만의 작품에서 원형의 디스크와 그 디스크를 담는 정사각형 프레임은 무의미한 시공간을 질적으로 도약하게 하는 완벽한 시공간에 대한 상징이다. 원형이나 정사각형 위에 새겨진 이미지는 음악과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독특한 공()감각적 체험을 자아낸다. 둥근 틀은 다양한 청자 빛을 품은 하늘이자, 정신, 그리고 자아라는 중층적 상징이다. 나비가 자신의 분신이라면 자아 안의 또 다른 자아라 할 수 있겠다. 그것은 이데아와 같은 완벽함을 지향한다. 시오반 로버츠는 한 기하학자의 생애를 다룬 저서 [무한 공간의 왕]에서, 만물을 수()로 간주한 피타고라스의 후계자를 플라톤으로 본다. ‘신은 언제나 기하학 원리를 적용한다’고 말한 플라톤은 이데아적인 기하학 형상들로 원, , 정사각형, 정육면체 등을 들었다. 그것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고 물리적 세계와는 독립적인 그들이 속한 보다 높은 세계에 존재한다고 믿어졌다.

문수만의 작품에서 원이나 정사각형 프레임은 이데아처럼 논리적인 엄밀함이나 절대적인 순수함을 지향한다. 모사와 창안이 복합된 나비, 그리고 도자기나 청동기에 새겨진 무늬같은 이미지들, 그리고 이를 감싸고 있는 둥근 틀은 상징적이다. 에른스트 카시러는 [인문학의 구조 내에서 상징형식 개념]에서, 우리는 자연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식에 의해 구성된 문화 세계 속에 살고 있으며, 이 문화세계는 일정한 생성 법칙으로 구성된 다양한 상징형식들의 체계이라고 말한 바 있다. 카시러가 정의한 상징의 개념으로 그의 작품을 보자면, 자연(나비, 창공)이나 인공(도자기, 청동기)같은 감각적인 것은 상징을 통해 정신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획득하고, 정신적인 것은 다시 상징을 통해 감각적인 세계로 나아간다. 상징을 통해 근대 이후 갈갈이 찢어진 자연과 예술이 다시 만난다. 문수만의 작품에서는 기술 또한 이러한 만남에 포함된다.

그러나 과거 이력이 어떠하던 간에 그는 현재 캔버스 위에 유화나 아크릴로 작업하는 화가이다. 예술이 무한을 다루는 방식은 철학이나 과학과 차이가 있다.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과학이나 철학 못지않게 예술도 사유하긴 하지만, 그것은 정서와 지각들을 통한 사유라고 본다. 저자들에 의하면 과학과 철학과 예술 사이에는 무한한 상응들로 짜여 진 직조 망이 구도들 사이에 자리한다. 각 개념들은 다른 개념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진동의 중심을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는 서로 잇닿아 일어나거나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공명한다. 문수만이 다양한 가능성을 탑재한 캔버스 표면을 툭 쳐서 균열을 내고 보이는/보이지 않는 맥을 통해 공명을 꾀하듯이 말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예술의 고유함을 유한을 거쳐 무한을 되찾는 것이라고 본다. 예술의 방식은 철학이나 과학과 다르다. 저자들에 의하면 철학은 무한에 일관성을 부여함으로서 무한을 구원하고자 한다. 반대로 과학은 지시 관계를 얻기 위해 무한을 포기한다.

그러나 예술은 무한을 복원시키는 유한을 창조하고자 한다. 문수만의 작품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개념화하는 바의 ‘무한을 되돌려주는 구성’은 무한대를 향해 열려져 있는 표면에서 발견된다. 둥근 캔버스의 표면과 나비의 표면, 그리고 변형을 꾀하는 듯 이상야릇하게 배치된 갖가지 무늬의 관계망이 그러하다. 그의 작품에서 공간은 보일 듯 말 듯 한 얼룩부터 꽉 찬 무늬 등 다양한 밀도를 가지지만, 빈 공간(허공)은 필수적이다. 그것은 변형을 준비하면서, 완벽함이라는 미명아래 작품을 유한한 형식체계로 환원될 수 있는 가능성에 거리를 둔다. 여기에서 운동은 비슷한 시각상을 가지는 틀과 도상들 사이 뿐 아니라, 중층적 상징들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여기에서 상징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유동하며 공명한다. ‘맥’이라는 개념과 형상이 그 예이다. 그 맥이 펼쳐지는 장은 자아이자 하늘인 둥근 캔버스이다. 여기에 선명한 상징은 소우주와 대우주의 상응이라는 사유이다.

상응은 범주의 혼돈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소원해진 인간의 대안적 사유이다. 인간의 위치가 가치가 어느 때보다도 흔들리고 있는 이 시대에 참고할만한 것이 상응이라는 고래의 유비적(analogy) 사유이다. 신학에 보편적인 유비적 사유는 동양 사상에도 낯설지 않다. 문수만의 작품에서 이러한 상응은 무한에 대한 사유를 매개로 펼쳐진다. 에른스트 카시러는 [르네상스 철학에서의 개체와 우주]에서도 쿠자누스를 인용하면서, 신에 맞서는 두 가지 형태의 상대적 무한함을 설정한다. 그중 하나는 우주를 통해 드러나며, 다른 하나는 인간 정신에서 드러난다. 전자에서는 우주가 어떠한 공간적 한계도 가지지 않고 무한한 넓이로 확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통해 절대적인 무한성이 구현된다. 시간과 그것의 무한한 지속에 관한 앎, 그 지속을 중지시키고 사유를 통해 확인 가능한 계량으로 환원시키는 앎 또한 그러하다. 동심원 또는 동심원이 잠재되어 있는 문수만의 둥근 캔버스는 ‘르네상스 철학에서의 개체와 우주’처럼 소우주와 대우주의 간의 상응을 이룬다.

[르네상스 철학에서의 개체와 우주]에 의하면, 르네상스 시대에 인간은 우주에 대하여 그리고 자아는 세계에 대하여 둘러싸이는 동시에 둘러싸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르네상스의 인간은 신과 무한한 우주에 대해 감싸면서 감싸이는 관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충만한 단편이 아니라 불완전한 파편의 시대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전인(全人)적 사고이다. 현대에 가장 지배적인 방식, 즉 극단적인 분업을 통해 생산력을 높이는 과학기술은 인간 자체를 말소해 간다. 긍정적인 의미든 아니든, 과학 기술은 휴머니즘과 무관하다. 물론 근대의 과학혁명을 거친 이 시대에 르네상스식의 계층적 우주는 상징적 차원으로만 유효하다. 이 상징적 우주는 존재만큼이나 생성을 중시한다. [르네상스 철학에서의 개체와 우주]에 의하면, 철학에는 서로 엄격히 구분되는 두 서술 수단, 즉 존재의 영역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성의 영역을 위한 것이 있다. 카시러에 의하면 항상 존재하는 것, 즉 항시 자기 자신과 동일하며 항구적으로 불변인 것에 대해서만 엄밀한 지식이 가능하다.

반면 생성하는 것, 즉 시간적으로 제한되어 있으며 순간순간 변하는 것에 대해서는 지식에 의한 그와 같은 파악이 불가능하다. 변화를 수용하기 위해 넉넉하게 비워놓은 문수만의 작품 속 공간들은 존재의 자리 뿐 아니라, 생성을 촉구한다. 청자 빛 하늘을 담은 원형 캔버스는 하늘이라는 변화무쌍한 실재를 담는다. 장 살렘은 [고대 원자론]에서 만일 모든 것이 꽉 차있다면 운동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한 원자론자들을 소개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원자론자들은 허공이 없다면, 운동은 있을 수 없고, 허공이 운동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생성은 무에서부터의 창조가 아니라, 이전 세계의 잔해들로부터 온다. 문수만의 작품에서 생겨나는 입자들과 사라지는 입자들이 함께 유동하는 듯한 고풍스러운 도자기나 청동기 표면에 대한 시뮬레이션은 생성을 강조한다. 시뮬레이션/생성은 재현/생산과 대조된다. 그의 작품은 한국적 또는 동양적 바탕과 형상을 취하지만, 자연을 자신 속에 포괄한다는 점에서 동양과 서양의 사유가 만나는 지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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