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23/09/14 (목) 23:44
분 류 작가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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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를 위한 생성의 자리

존재를 위한 생성의 자리

문수만    

몰입은 무한한 상상으로 캔버스의 대지를 지배하게 한다. 화면은 기계부품처럼 맞물려 돌아가듯 복잡하지만, 신중히 들여다보면 형태 보다 여백을 더 중시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공간 속에는 질서와 자유가 공존함을 의미한다.  개체와 여백 즉, 질서와 자유에 대한 표현은 작가로서의 삶에 대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최근의 작품군인 클라우드(cloud) 연작은 쌀알의 형태소를 동심원의 형식으로 화폭 안에 무수히 증식하거나 수평 또는 수직으로 배열하는 형태의 추상회화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군은 초기의 ‘새나 나비형태의 꽃 그림’을 위치시키기 위해 배경에 대한 여러 조형적 실험을 거치게 되었다. 그 결과로 자연스럽게 한국적 고유의 유물의 이미지를 안착시키기까지 이른다. 즉, 도자나 범종 등의 한국적 유물의 3차원 형상을 2차원의 이미지로 평면화하는 시뮬라크르(simulacre) 연작이 되었다. 그 연작을 바탕으로 이도다완의 굽(매화피)의 질감을 탐구하는 프랙탈(fractal) 연작으로 전개되었다. 이들 연작들이 표방하고 있는 원형구도에 작은 쌀알의 형태소를 대입하여 집적하는 방식으로 클라우드(cloud) 연작으로 이어졌다. 그 이후에 원형뿐만 아니라 수직, 수평으로 극대화하는 클라우드(cloud) 연작이 탄생하기에 이른다. 

화가들은 인물이나 사물 그리고 풍경을 화폭에 담기 위해서 환영(illusion)을 생성하는 재현의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왔다. 화폭 위에 마치 실제의 사물이나 풍경이 있는 것처럼 그리는 눈속임 기법(트롱프뢰유)을 통해 3차원의 대상을 2차원 위에 재현하였던 것이다. 즉 3차원의 실재를 환영으로 복제하는 ‘더 진짜 같은 가짜’의 위상을 주장하는 시뮬라크르(simulacre)의 속성으로 볼 수 있다. 시뮬라크르(simulacre) 연작은 ‘입체를 평면으로 펼친 전개도처럼 화폭에 담고자 한 시도’가 된다. 지구와 같은 구체(球體)의 경위선을 평면에 투영하여 표시하는 지도 투영법(Map Projection)과 같은 전개도법(developed projection)의 방식으로 도자나 범종 같은 사물을 하늘(위)에서 누르는 방식처럼 평면화 했다. 시뮬라크르(simulacre) 연작은 유물의 전체 이미지를 한 눈에 보기위해 원형의 평면에 펼쳐낸 왜곡의 지표가 원본이 된다. 시뮬라크르는 투시 원근법을 통해 평면 위에 입체(3d)를 세우는 것이라면 시뮬라크르(simulacre) 연작은 반대로 평면 위에 입체를 눕히는 것이다. 작품 〈Simulacre-02〉은 국보 95호인 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를 모티프로 한 작품이다. 향로의 형태를 보면 기하학적인 문양의 중심의 뚜껑부분과 그 주위를 감싸고 있는 국화 잎과 외곽의 토끼 3마리가 향로를 떠받치는 형상을 한 청자이다. 작품 〈Simulacre(021708)〉은 평면 구도에 맞게 서로 위치를 바꾸는 방식으로 왜곡하여 재편되어 있다. 중심축을 기점으로 방사형으로 원 띠를 이루며 문양들이 포진되어 있다. 시뮬라크르(simulacre) 연작에서는 중심의 문양이 외곽으로, 테두리의 문양이 언제라도 중심에 놓여 질 수 있는 구도로 재해석 될 수 있다. 그것은 원래의 주인공이 조연의 위치에, 조연의 외곽의 문양이 중심으로 위치해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즉 어떠한 이미지도 어떠한 문양도 어느 것 하나 주(主)와 종(終)이 뒤 바뀔 수 있는 민주적 재편을 통해서 새로운 왜상의 지표로 등극시키려는 필자의 의도라고 봐도 틀린 것은 아니다.

클라우드(cloud) 연작은 ‘쌀알 이미지’인 작은 형태소를 무수한 집적으로 화폭을 가득 채워 나간다. 그 결과 화폭은 어른거리는 환영을 제공한다. 그것은 가상의 변화를 창출하면서 시간성을 내포한다. 하지만 옵아트적인 환영의 시각적 효과는 본질이 아니다. 쌀알이라는 형태소로 통해서 고된 노동으로 이어간다. 그 결과물로 창출된 이미지는 순환의 시간성의 개념에 신중히 집중한다. 마치 클라우드(저장소)의 폴더에서 파일을 꺼내어 부분으로부터 전체로 구축해 가는 과정이라 해도 무방하다. 또한 쌀알은 필자의 「어린 시절에 쌀을 구하기 위해 어머니와 둘이서 소중한 재봉틀을 메고 전당포에 맡겨야만 했던 잊을 수 없는 기억의 상징이기도 하다.」① 쌀알의 형태소가 나타난 배경은 시뮬라크르(simulacre) 연작과 프랙탈(fractal) 연작의 연장선상에서 고구려의 역사와 유물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쌀’이란 소재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것의 조형적 문자와 의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유물의 입체(3d) 문양을 평면(2d)으로 변환하는 골몰했던 당시의 원형구도의 작품에서 문양 대신 쌀알 이미지로 대치하는 새로운 클라우드(cloud) 연작을 시작하게 되었다. 쌀은 인간의 생존을 이끌어온 양식이자 한민족의 주식이다. 쌀의 길쭉한 형태에, 한쪽에 쌀눈이 떨어져나간 형상은 클라우드(cloud) 연작에서 기본적인 형태소로 사용된다. 이러한 쌀알의 형상 자체는 「비대칭의 당초문양을 함께 등장시켰던 시뮬라크르(simulacre) 연작과 대칭적 형상의 프랙탈(fractal) 연작을 조형적으로 계승」②하였다. 클라우드(cloud) 연작의 무한함을 연상시키는 형태소의 도열이나 단색조 분위기의 정제된 화폭에서도 필자의 정신성은 이어진다. 무(無), 허(虛), 공(空)같이 정형화(定型化)되기 힘든 관념도 담기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작품<Cloud-789>에서처럼 둥근 구도는 끝과 끝이 연결되어 무한을 연상시키기에 수월하다. 작품<Cloud-919>에서 수평적 구도의 경우에도 화면 바깥으로도 연장되는 느낌을 살리게 되면 무한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최근의 작업에서는 시작과 끝의 중간 토막을 신중하게 포착한다. 색과 색이 만나면서 경계가 생긴다. 어떤 색이 공존하든 경계는 부드럽게 연결한다. 하지만 색끼리 강하게 부딪히면 조력자와 같은 역할이 필요하다. 그 조력자인 다른 색으로 서로를 동화하게 만든다. 그것이 대자연의 풍경이라면 당연히 하늘이나 바다, 또는 둘 다이다. 조력자로 쓰인 색 띠는 일출과 같은 중요한 사건을 알리는 증후이면서 그 사건의 축이 되는 지평선이나 수평선역할로 변모한다. 화폭은 좁아서 중간의 토막은 유한하지만 작품의 변주는 무궁무진하다. ‘클라우드(cloud)’라는 제목은 하늘에 떠 있는 자연스러운 구름(cloud)을 암시한다. 또한 「현재 디지털 시대에서 공유되고 있는 정보의 저장소(cloud)를 상징한다.」③ 저장소를 채우는 것은 쌀 알 모양의 개체이지만 필자는 물질과 문화의 관계를 다루고 싶었다. 점이 기하학적이고 관념적 요소라면, 쌀은 유기적이며 물질적인 요소다. 수평구도의 규칙적으로 배열된 형태소는 문자배열의 형태를 염두에 두었다 해도 무방하다.

그림을 멀리서 보면 색이 보인다. 그리고 좀 더 다가가 보면 색 면의 경계와 결이 보인다. 그리고 바짝 다가가 들여다보면 화폭을 온통 가득 채우고 있는 쌀알의 형태소가 보인다. 역순으로 보자면, 화면에 가득히 배열된 쌀알의 형태소는 결을 만들고, 그 결은 다시 모노크롬의 단색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그림 속에 단색이 있고, 배열이 만든 결이 있고, 쌀알 하나하나를 묘사한 형태소가 있다. 배열과 배치로 패턴과 같은 결을 만들고 그 결은 단색의 색면을 창출한다. 재현으로 나타난 회화의 중추 개념들이 하나의 그림 속에 다 들어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필자는 거리두기 문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작업 이후의 화랑에 걸린 작품을 관람에 대한 것이다. 거리두기란, 어떤 사물이나 사태를 더 잘 보기 위해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용어로, 단순히 시각적 경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진리와 진실과 같은 관념적인 내용에도 적용되는 개념이다. 「심적 거리라는 개념과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리에 따라서 그림이 달라져 보인다는 사실이다.」④ 이처럼 그림을 관람하는 또 다른 방법까지도 제안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서양에는 우주를 설명할 때 우주 옆에 우주가 있고 그 우주들 합쳐져 대우주를 이룬다고 했다. 동양에서는 티끌 안에 우주가 있다고 했다. 조그마한 것에서 큰 것으로,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보는 관점에 따라서 가치관이 틀려진다. 필자의 그림에서는 후자로 설명하기가 쉽겠다. 그러므로 티끌 안에도 우주가 있듯이 모든 것에는 존재의 가치가 있다고 항상 생각해왔고, 필자의 그림에서도 그것이 느껴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간 여러 작업의 변화를 거쳐 현재 클라우드(cloud) 연작에 이르기까지의 근본적인 테마는 저변부에 깔려 있는 인간들의 얽혀진 관계와 순환의 세계관은 작품의 모태가 되었다. 그간의 변화무쌍한 외형적 탈바꿈에도 바뀌지 않는 인간의 본성과 맥락을 같이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힘에 대한 의지’는 '더 많은 힘을 원하는' 본성으로 되돌아오길 거듭한다. 예술가로서의 삶에 대한 선택과 그것에 대한 ‘디오니소스적 긍정’을 통해서 오늘도 필자는 운명애를 가슴에 안고 창작의 문을 열고 작업실에 들어간다. 그것은 몰입을 통해서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필자의 신념과 맞물린다고 볼 수 있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그리고 지우는 반복적인 수행과 같은 행위를 통해서 내 자신의 미약한 존재를 인식하면서, 인류애를 깨닫는다. 한민족의 찬란했던 예술적 기질로 우리 고유의 색과 선을 찾기 위한 고행은 계속될 것이다.

참고문헌
① <평론> 坂上義太郎, 文水萬 集積された米粒, 2023 
② <평론> 김성호, 몰입을 통한 자유 의지의 표출, 2021
③ <평론> 이선영, 문명을 일궈온 곡식 알갱이 그림에 박히다, 2022
④ <평론> 고충환, 쌀알에서 파생된 우주, 자연, 존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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